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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군밤의 왕/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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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 '''천하장안'''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전에 어울렸던 중인 신분의 4인방. 각자의 성을 따서 천하장안이라고 부른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하지 못하는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수족으로 쓰이다가 1898년 기준으로 모두 천수를 누리고 갔다. * '''천덕기''': 천덕만의 숙부. 중인이다. 그런데 장사나 손재주 부리는 일에 영 재주가 없어 천하장안에서 주먹질을 담당하게 됐다. 싸움 솜씨는 어지간한지 주먹 한 번 휘두르면 사람이 두셋씩 나가떨어진다. * '''하일평''': 일명 족제비. 도성 색주가를 꽉 잡고 있다. 도성 안의 소문이라면 익문사만큼이나 훤히 알고 있다. * '''장천동''': 재간꾼. 구름재댁이 운현궁이 되면서 어엿한 문객이 되었다. 천하장안 중에서 가장 장수하여 이해조가 무치춘일기를 쓸때 도움을 줬다. * '''안동수''': 바람잡이. 사람 마음을 잘 읽는다. 그래서 대원군을 대신하여 익문사를 지휘했다. * '''화서학원''' * '''문경공(文敬公) [[이항로]]''' 산림의 거두. [[최익현(고종, 군밤의 왕)|최익현]]의 스승. 귀남이 즉위한 후 대원군의 부탁을 받고 조정에 출사하여 [[승정원|동부승지]]가 됐다. [[위정척사파]]로 활동한 원역사처럼 서양과의 개화에 반발하는 척화파로 '개화소'의 신법에 거세게 반발했으나 귀남이 직접 불러 "밤은 알맹이가 없는 쭉정밤이 아니고서야 전부 잘 구우면 맛있다. 지금 조선의 상황은 집에 노모가 계신데 포대자루에 밤이 몇 톨 안 남은 것과 같다. 맛있게 구워서 양껏 드시게 해 드려야지 이런 건 이렇고 저런 건 저렇다고 빼내 두어 톨만 바칠 수 있겠느냐."는 귀남식(?) [[흑묘백묘론]]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자신을 벌하거나 정치적 희생물로 삼지 않고 진지하게 설득하려는 그 태도에서 정학을 경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고 감화되었다. [br]하지만 본인이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별개라 개화의 흐름을 정확히 짚으면서도 정학의 도를 지킬 수 있는 제자 최익현에게 뒷일을 맡기고 기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사후에 제자들이 호를 딴 화서학원을 세운다. 귀남이 내탕을 털어 현판 사액을 해주려 했으나 [[악필|어필의 자유분방함]] 때문에 제자들이 극구 사양하고 제수만 받기로 한다. 그의 문하생들이 훨씬 현달한 덕분에 원 역사보다 십수 년 앞서 문경공(文敬公)이란 시호를 받는다.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0889|김평묵]]''' [[최익현(고종, 군밤의 왕)|최익현]]의 사형. 명석하다는 소리를 못 듣지만 우직하면서도 마음씨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최익현이 출사한 이후 화서학파의 좌장이 되었다. 개화 초기 그토록 열심히 힘써 배웠건만 선비가 필요 없는 세상이 왔다고 좌절하였으나 안동 김문의 후원을 받아 세운 화서학원을 운영하고 제헌 과정에 참여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했다. * '''[[유인석]]''' [[최익현(고종, 군밤의 왕)|최익현]]의 후배. 화서학원에서 서양사를 가르치고 있다. 명전법이 시행되면서 처분한 전답값으로 정미소를 차렸다. 철저한 복고주의자였던 원 역사와 달리 젊었을 때부터 개화의 물결을 바라보고 서양사를 공부하면서 여러 모로 개방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신촌향약 문제로 문중 어르신들이 집결했을 때는 우리도 백성들에게 양보할 거는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최영조(崔永朝) & 최영학(崔永學)''' 최익현의 장남과 차남. 화서학원에서 학문을 닦고 있다. 둘 다 흥국부도라는 이름의 제국주의에 심취하여 아버지 속을 썩였다. 이후 영조는 화서학원의 교수가 되었다. * '''[[https://www.yeoju.go.kr/history/jsp/Theme/Save_View.jsp?BC_ID=b1851|이경응]]''' 원 역사 의병장. 화서학원에서 유인석의 태서통사(서양사통사)를 수강했다. 제1회 전국 추거를 앞두고 유인석에게 어느 당을 찍을지 여쭈었는데 정말로 듣고 싶다면 박사 과정까지 밟으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러나 고시 노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학원으로 돌아와 유인석 밑에서 박사 노릇하게 됐다. 이후 화서학원에 새로운 학과 종횡학([[국제정치학]])이 생기면서 조교수에서 교수로 바로 올라섰다. * '''[[안창호]]'''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4대 국무령. 젊은 시절 평양의 기전에서 벌어졌던 소동을 보면서 정말로 조선을 조선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고심하게 되면서 동서고금 역사를 공부하다가 화서학원에 입학하여 이경응의 첫 제자가 됐다. * '''노사학원''' * '''[[기정진]]''' 원 역사 노사학파의 시초. 원 역사에선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참의대부로 추천되어 도성으로 상경한다. 나중엔 [[https://ko.wikipedia.org/wiki/톈진_교안|톈진 교안]][* 원 역사에서도 있었던 톈진에서 서양 선교사와 상인에게 불만을 품은 중국인들이 뜬소문을 빌미로 일으킨 폭동.]의 후처리를 위해 텐진에 의회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참의대부 제도가 [[조광조]]의 [[현량과]]에서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하는 제도라고 높이 평가하는 중. 사후에 제자들이 호를 딴 노사학원을 세운다. * '''[[전우(학자)|전우]]''' 원 역사에서 조선의 마지막 거유(巨儒)라 불린 성리학자. 원 역사처럼 이항로와 기정진의 논설을 모두 비판하는 논설[* 기정진의 "외필"을 반박하는 "외필변"과 이항로의 "화서아언"에 반박하는 "화서아언의의"]로 졸지에 양쪽 제자들한테 찍혀 공공의 적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영국에 도피성으로 유학와서 존(John)으로 불리다가 스펜서와 토머스 헉슬리 등 당대 다윈의 추종자들과의 논쟁과 토론에 참여했다. 이후 진화론의 사문난적 [[프랜시스 골턴]]과의 공개 토론회에서 2승 1무를 기록하였다. 이때 활약으로 청나라 강남 향신들 사이에서도 명성을 떨치게 됐다. 조선에 귀국한 이후 1889년에 최익현의 부탁을 받고 [[곡부]]에서 열리게 된 국제 유교 학술대회의 운영 총책을 맡게 됐다. 대원군이 떠난 뒤에는 노사학원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이용해 여민강학을 내세우며 한양에 강당을 세웠다. * '''한주학원''' * '''[[https://ko.wikipedia.org/wiki/이진상|이진상]]''' 원 역사 조선 말의 유학자. 경북 성주군에 위치한 성산에 대학원을 차렸다. 제헌 과정에서 임금이 자신이 세운 법을 자신이 따름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며 [[입헌군주제]]를 옹호했다. * '''[[곽종석]]''' 원 역사 조선 말의 유학자. 노씨권학상 정하는 일로 한주학원 대표로 위촉되어 간만에 상경하였다가 가로등 아래서 남녀가 부끄럼 없이 상종함을 보고 대경하여 남녀가 유별함을 강조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후 전우를 도와 곡부에서 열린 국제 유교 학술대회의 사무를 맡았다. * '''[[천도교]]''' * '''[[최제우]]''' [[동학]]의 교조. 원 역사에서는 혹세무민의 잡교로 탄압받아 나이 41세에 순교하였으나 본작에서는 사람 목을 쌓아올려야만 살 수 있는 나라라면 차라리 망하는게 옳다는 신념을 가진 귀남이 개화 초기 문호 개방과 함께 서학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동학이 어엿한 종교로 인정을 받아 자유로운 포교활동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전부터 국가의 지원을 받은 [[유교]], 천오백년 이상 한반도에 뿌리내린 [[불교]]나 서양이라는 뒷배가 있는 [[천주교]]와 달리 신흥종교인 동학은 딱히 내세울 것이 없어 국내 교세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고 새로운 신도들을 찾아 조선인들이 속속 정착하고 있는 만주로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간판을 천도교로 바꿨다. * '''[[최시형]]''' 원 역사 동학의 제2대 교주. 연해주 대접주 구실을 하고 있다. 연해주에서 러시아 관료들이 조선인 거주권을 제한하는 등의 강경책을 펴려 하자 조선인들이 단체로 격쟁을 일으키는데 이때 최시형이 그 대표 자격으로 글을 올렸다. * '''[[이필제]]''' 원 역사에서 [[이필제의 난]]을 일으킨 그 이필제다. 국뽕에 취해 [[북벌]]의 때가 왔다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청국 공사관을 뒤집어 엎어 조청간 외교분쟁을 일으키는 대형사고를 쳤다. 심지어 직후 붙잡혀 의금부로 투옥되어 귀남에게 친국을 받는 와중에도 [[치킨 호크|천하의 무도한 자들을 정벌해야 한다는 둥]] 헛소리를 늘어놔 [[6.25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PTSD가 있던 귀남을 분노케 하였다. 귀남은 "역시 사내는 군대를 가야 전쟁 무서운 줄 알고 사람이 된다."라고 확신하고 군포로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던 조선에 징병제를 도입한다. 필제 역시 징집되어 갖은 욕을 다 먹어가며 '''[[길림성]]'''에서 뺑이 쳤다.[* 정확하게 말하면 필제는 징집된 것이 아니라 형벌의 일종인 충군(充軍)에 처해진 것이다.] 전역하고 나서도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길림성에서 살고 있다. 천도교에 입교하면서 이름도 바꿨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필제가 귀남에게 갈굼당한 일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터라 징집된 장병들의 원망이 날로 커지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 [[예비군]] 제도가 도입되고 당시 전 장병의 군생활을 6개월이나 연장시킨 [[1.21 사태]]의 주범인 [[김신조]]가 술집 화장실에서 소변 보다 그 당시 군생활 한 사람한테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물론 전후사정이 어떻든 김신조를 때린 건 엄연한 [[폭행]] 범죄라 백 번 양보하더라도 군생활 한 사람이 화를 참지 못한 잘못이고, 김신조는 대한민국에 나름 잘 적응해서 지금도 잘 살고 있긴 하지만.] 심지어 한 번 실수로 대대손손 세상 사람들 욕을 먹는다는 '신미년 필제 같다'는 속담까지 생겼다. 거기에 격노한 주상이 필제에게 [[벼루]]를 던졌다고 [[카더라]]는 설화도 탄생했다.[* 그리고 이 설화는 대역갤에서 더더욱 와전되어 귀남이 벼루를 던진 게 질화로를 던진 걸로 바뀌었고 더 나아가 아예 귀남옹이 필제'''를''' 질화로에 던졌다로까지 이야기가 커졌다. 아예 군밤 굽는 질화로에서 태워지는 땔감 취급을 받기도 한다.] 경양대군도 철 없을 때 그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귀남에게 질문할 정도. * '''[[장승업]]''' 조선 후기의 화가. 오경석을 부탁을 받고 익정신보에 박규수를 공격하는 만평을 실었다. 이후 1874년에 오경석의 갑질에 분노해 술 마시고 홧김에 뜻이 통하는 이들을 모아 신보도중(신문노조)을 결성하였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도중 결성 붐이 일었고 그 소식을 뒤늦게 들은 귀남과 흥선군이 경악했다. 그 직후 흥선군이 소요를 억제하려 보낸 익문사 및 천하장안과 충돌하면서 한양에서 한바탕 난리 법석이 나게 만들 뻔 했으나, 귀남이 어명을 내려 도중을 존중할 것을 지시하면서 도중은 왕명으로서 간접적으로나마 설립 허가를 얻었고, 익문사도 불미스러운 유혈사태로 번질 뻔한 일을 잘 무마하고 공안서로 간판을 바꿔 단다. 그런데 영혼이 자유로운 장승업은 막상 소요가 길어지니 지루하다며 슬쩍 뒤로 빠졌다. * '''[[진령군]]''' 원 역사에서 [[명성황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은 [[무당]]. 본작에서는 주영공사로 부임한 이호준이 영국 귀부인들 사이에서 심령주의가 유행한다는 것을 알고 요샛말로 표현하면 민간 외교관으로 써먹기 위해 유학생으로 데려와 사교계에 풀어놓았다. 동양의 신비라고 하면 껌뻑 죽는 사람 한가득이라 이런저런 잔재주를 사용해 '신령의 참 주인(Mistress of Spirits)'[* 진령군(眞靈君)을 그대로 직역한 칭호다.]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귀부인들의 강령회에 단골 손님이다. 독일의 황태자비 빅토리아도 황태자의 수술 문제로 상담을 청할 정도이다. 영국에서 [[알레이스터 크로울리]]를 제자로 들여 오컬트 단체 황금개벽회를 세웠다. 알레이스터는 스승이 사기라는 걸 반쯤 직감하고 있지만, 그래도 뭔가 배울 게 있지 않을까 해서 계속 붙어 있는 중. 그 뒤로도 영국에 머물고 있으며 외국의 과학자를 조선에 데려가고자 하는 안양대군을 만나 치올코프스키와 퀴리 부부에 대해 알려준다. 작중 서술을 보면 그냥 흔하디 흔한 사기꾼 무당인 듯하나, 무속인의 직감 같은 무언가가 있는지 은근히 맞는 예언을 하거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주는 일이 꽤 많다. * '''[[순흥 안씨]]''' 조선이 개화하면서 나타난 신흥 재벌가다. 기존의 문벌들이 문중의 재산을 털어 재계에 뛰어들어 재벌가가 되었는데 신흥 재벌들은 이러한 명문세족들과 재력에서 맞먹음에도 명문세족들이 인정하지 않자 그들과 사이가 나쁘다. 이중 대표격이 안인수의 가문이다. * '''[[안인수]](安仁壽)''' [[안중근]]의 조부. 한미한 향리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재주가 좋아 싸전을 경영하며 틈틈이 땅을 사들여 족히 천석꾼 소리 들은 법하게 되었고 명전법이 시행되고 나서는 곳간 헐어 고을의 환심을 두루 사 해주의 참의대부가 되었다. 이후 시류를 읽고 이런저런 기물의 작은 부속 따위를 만드는 공방을 차렸는데 꽤 성황을 이루어 도성에서 세도가 우두머리들 다음 가는 부를 쌓았다. 그러나 돈만 가지고 거족들에게 대우받을 수는 없었고, 김병학의 회갑연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욕을 본 이래로 거족들이 하는 일이라면 우선 팔 걷어붙이고 훼방부터 놓고 있다. 1898년 시점에선 고인인데 신흥 재벌들의 영수답게 서양식 장례를 치른 듯. * '''[[안태훈(1862)|안태훈]](安泰勳)''' 안인수의 셋째 아들. [[안중근]]의 부친. 원 역사에서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 유학이 좌절되어 은거했다가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참여했다. 본작에서는 안인수의 의지로 과거 대신 해외 유학을 다녀오고 사업 감각을 기르고 있다. 안인수가 신흥 재벌이라 명문가들이 무리에 끼워주지 않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사상을 전파시키기 위해 정동에 건물 하나를 세내어 조선 최초의 [[클럽]] 정동구락부를 차렸다. * '''[[안중근]]''' 원 역사의 독립운동가. 조선의 신흥 재벌가의 대명사 순흥 안문의 장손이다. 한창 사춘기라 서원을 빠지고 윤치호가 운영하고 있는 실탄사격장에 가서 총을 쏘곤 한다. 할아버지인 안인수가 개화당, 즉 명문세족들을 증오하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다. 1900년 나카사키 아주대회에 조선국 사격 대표로 참가하여 당당히 옥패를 차지했다. 운명의 장난일까, '''[[이토 히로부미]]'''가 메달을 달아줬는데 도중에 이토가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이유를 알 수 없는 복통]]을 호소하며 잠깐 식이 중단되는 헤프닝이 있었다. * '''[[조병갑]]''' 원 역사에서 고부 민란의 원인을 제공한 탐관오리. 인천 부두에서 세곡을 옮기는 운송업을 하면서 나름 벌어먹고 살고 있으며 그 성격 어디 안 간다고 꽤 유명한 망나니로 인천 부두 인부들 사이에서 그 악명이 자자했다. 그러던 차 막 조선에 입국한 엘러노어 마르크스에게 수작을 부리다가 조선 토박이 못지않은 현란한 욕지거리를 듣고 욕을 주고받다 [[싸대기|손찌검]]을 하려는 찰나 엘러노어가 먼저 날린 주먹에 맞아 인천 부두 한복판에서 아낙에게 얻어맞고 널부러지는 개망신을 당했다. 조선에서도 엘러노어의 아버지 카를 마르크스가 유럽의 큰 선비로 유명하여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과 통교할 때 그의 저서인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이 일찌감치 조선에 들어와 참의원의 3대 정당 중 하나인 '''만민공산당'''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고, 참의원의 만민공산당 뒤에는 만인지상인 주상전하의 아버지, '''운현궁의 흥선대원군'''이 있고 엘레노어의 남편 전봉준은 흥선군과 직접적인 인맥이 있다. 흥선군이 공안서의 수장임은 알 사람은 알고 있어 따지자면 이항로나 이진상 급으로 권위도 있고 거기다 조선 왕실과 연줄 닿아 있어 인맥도 만만치 않은 인물의 여식에게 함부로 치근덕거리다 얻어맞은 것과 진배가 없어 법적 조치는 무슨, 어디가서 하소연도 하지 못했다. * '''[[윤희순]]''' 원 역사의 독립운동가. 유인석의 조카며느리. 유인석이 차린 정미소를 대신 운영하고 있다. 제1회 참의대부 추거 때 정 뽑을 당이 없으면 여학을 널리 세운다는 공산당이나 뽑아달라 부탁한다. * '''[[홍범도]]''' 원 역사의 의병장. 징병된 장병들이 조선 팔도의 호랑이 씨를 말려 연해주 일대에서 포수 생활을 하고 있다. * '''권재형(=[[권중현]])''' 원 역사 을사오적의 일원. 궐석인 공조 상공참판을 대신하여 기무회의에 들어온 참의다. 영국의 동맹인 일본과 짜고 가짜 분쟁을 벌여 동맹인 프랑스와 러시아에게서 경제개발 오개년 계획 추진 자금을 얻어오자고 제안한다. 우발적 교전으로 독도 주변에서의 분쟁이 규모가 커지자 덜컥 겁을 먹고 사실 이 계책은 이토가 사적으로 제의한 것이라고 자백한다. 이것만이면 모르겠으나, 공안서 뒷조사로 이토에게 돈 받은 것도 걸린 모양이니 사실상 관직 생활은 다 한 셈이고 이후 사직한다. * '''한유천(=[[한용운]])''' 원 역사 [[민족대표 33인]]의 일원. 아직 [[수계|계]]를 받지 못한 [[화계사]]의 불목하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고민에 1895년에 가출하여 절간에 들었다. 이왕 가출한 거 세상을 더 보고 싶어 서울 근처 삼각산의 화계사를 택하였다. 1899년 겨울에 수계하여 사미가 아니게 됐다.[* 원 역사와 달리 여러 차례 절과 속세를 오가며 방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계를 더 빨리 받았다. 원 역사에서 유천이 수계를 받은 것은 1905년이다.] 조정에서 조선의 승려들에게 같은 불문의 사람으로서 몽골 활불의 진의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자 이에 응해야 한다고 동료 승려들을 설득했다. * '''[[https://ko.wikipedia.org/wiki/이채연_(1861년)|이채연]]''' 원 역사 한성전기회사 사장. 작중에서는 한성전차영운국의 국장(사장)이다. 치부하여 문벌 반열에 들어보고자 가산을 처분하고 상경하여, 야심차게 전차의 업에 뛰어들었다. * '''김치진(金致鎭)''' 원 역사의 조선말 상인. 작중에서는 한성전차영운국의 장차수(차장)다. 본디 선비인데 무인년 은소동 때 재산을 탕진하여 어찌어찌 하다가 장차수 노릇을 하게 됐다. 달려오는 안양대군의 차를 피하지 않아 한양에서 전차와 자동차가 부딪히는 [[교통사고]]를 내고, 다행히 안양대군이 크게 다치진 않았으나 왕족인 귀하신 몸에 상처를 입혔다는 이유로 투옥당했다. 이에 대군의 잘못이 더 크다며 한양 판심청에 소장을 넣었다. 이후 안양대군이 진솔하게 사과하면서 배상하겠다고 하자 소를 취하했다. * '''[[이해조]]''' 원 역사 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대원군의 의뢰를 받고 '무치춘일기'를 썼다. * '''[[김형직]]''' [[김일성]]의 아버지. 1898년 기준으로 양과자 사달라고 칭얼대는 5세 아이에 불과하며 하늘 같은 나랏님이 아직 나오지도 않은 저의 아들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음은 당연히 모르고 있다. * '''이학찬(李學贊)''' 원 역사 [[형평운동|형평사]]의 설립자. 백정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아예 축산업으로 성공하여 누구도 백정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있다.[* 아주대회에 출전할 때 '어떻게 백정 출신이 감히 출전할 수 있는가?'라는 비방이 나오기도 했지만, 귀남이 "그런 식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다 빼다가 [[한일전|일본에게 지기라도 하면 늬들이 책임질래]]?"라고 말하자 쑥 들어갔다.] 나가사키 아주대회에 조선 검도 대표로 출전하여 분투했으나 옥패를 놓쳤다. 조선에 귀국한 이후 안문의 후원을 받아 진주에서 '육식당'이라는 돼지고기만 취급하는 프랜차이즈 축산업체를 차렸다. * '''[[경허]]''' 원 역사 조선말 승려. 조정에서 불법으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젭춘담바 후툭투 8세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학식 있는 승려를 선발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처음에는 화계사 모임에서 멋모르고 나섰다가 망신을 당하느니 겸허하게 부족함을 시인하고 후일을 기약함이 사리에 맞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같은 불문의 사람으로서 몽골 활불이 조선국의 불교도들이 겪은 아픔을 겪지 않게 조언해야 한다는 한용운의 말을 듣고 마음이 동해 열하로 가서 교의에 따라 나라를 세우면, 그 나라의 운이 쇠할 때 교문도 쇠할 수밖에 없는 이치를 말하고, 독립하였을 때 몽골이 번영치 못한다면 중생의 마음이 불법에서 떠날 것이라고 넌지시 경고하며 독립보다 자립을 추구하라고 젭춘담바의 제자 담딘수렌을 설득했다. * '''[[박승직]]''' 원 역사 [[두산그룹]]의 창립자. 자신의 호를 딴 '매헌규방보국'을 차려 원 역사보다 14년 빨리 [[박가분]]을 출시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녹화회에서 박가분의 위험성을 일찍 발견하여 황급히 대체품을 개발하고 있다. * '''최현식''' 원 역사 [[최진립|제11대 경주 최부자]]. 자유당의 굳건한 지지자다. 최익현에게 수정애체를 선물했다. * '''[[https://ko.wikipedia.org/wiki/심의석|심의석]]''' 원 역사 조선말 건축가. 집안 어른들 따라 강남 유람 갔다가 상해에서 양관과 맞닥뜨리고서 개안하여 벼슬길 제쳐두고 건축에 입문하였다. 한양 명문 사이에서 조선국에서 처음으로 '건축가' 이름 부끄럽지 않다고 명성이 높다. 옥균의 의뢰를 받고 관악산 자락에 공연장 '세악당'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했다. * '''[[고사훈]]''' 원 역사 구한말 제주 의병장. 노사학원에서 학명을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수산 진흥에 힘쓰고 있다. * '''홍매화(洪梅花)''' 원 역사 제주 심방청(민간 무속 조직체)의 마지막 도황수(수장). 성산 바닷가 평범한 집 여식으로 조실부모하여 어린 나이에 심방(무당)이 되었다. 사실 제대로 된 심방이 아니라 견습의 견습에 불과하지만, 야심이 넘쳐 같은 무당인 진령군처럼 한탕 건져 금의환향할 생각으로 제주도 공산당 사람들 꼬드겨 유학길에 올라 그렇게 꿈풀이가 용하다는 오스트리아 서생 프로이트의 제자 겸 비서가 되었다. 그 꿈풀이 방법이 자신이 예상한 것과 많이 다르기는 하였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어 계속 프로이트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에필로그에선 김귀남 옹과 몸이 바뀐 이명복에게 프로이트로부터 사사한 무의식 관련 지식을 설명하는 '소싯적 오지리국에서 수학한' 무당으로 등장.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7236|최남]]''' 원 역사 일제강점기 상인. 이용익이 라디오 사업에 뛰어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업하자고 찾아가 외판을 맡게 됐다. * '''[[여운형]]'''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제9대 의장. 귀남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창의군에 합류해 서부전선으로 갔다. * '''[[조소앙]]'''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제5대 의장. 귀남의 연설을 듣고 창의군에 합류해 최익현을 보좌하고 있다. * '''[[김규식]]'''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외무부장. 귀남의 연설을 듣고 창의군에 합류했다. 옥균이 개화당으로 오도록 최대한 포섭할 생각이다. * '''김귀남(=[[이명복]])''' 역사 뒤바뀐 조선에서 태어난 [[김귀남]]. 10살 때 이명복, 즉 원래대로라면 이 세계의 고종이 되었을 개똥이의 혼이 들어왔다. 그런데 불행히도 명복의 몸에 들어간 진짜 귀남과는 달리 전생의 기억만 뚜렷하고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은 완전히 잊어버려 부모 얼굴도 못알아보는 바람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하여 어찌어찌 영험한 무당에게 가서 상담을 받았는데, 그 무당이 바로 빈에서 정신분석학을 배운 홍매화라서 귀남(명복)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무의식적으로 그 공백을 그나마 머릿속에 남아있던 고종대왕 일대기로 메꾼 것이라는 무척이나 현실적인 진단을 내렸다. 본인은 실제 이명복이었으므로 기억이 너무 생생한 까닭에 처음에는 수긍하지 못했으나, 나이를 먹고 학교에서 고종대왕의 업적을 배우면서 자신이 이렇게 훌륭한 임금님이 되었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에 어렸을 때 받은 상담을 그대로 믿게 되었다. 이후 2013년까지 정정하게 살면서 (저 혼자만) 효자율 제과, 육월당에 필적한다고 자부하는 제과국을 운영하며 저의 욕심만큼은 아니어도 적잖이 치부하였고 부부 금슬 좋지 못하지만 자손도 여럿 봤다. 본래 성격이 어디 안가는지라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성격이라서 효자율 제과 따라잡겠다고 욕심 부렸다가 큰 곤경에 처해 거의 강제로 총명한 둘째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하였지만, 말년에 고종대왕 컬렉션을 모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 * '''[[김정일]]''' 원 역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최악의 독재자였던 원 역사와 달리 분단될 일은 물론 나라 망할 일도 없던 조선에서 자기 적성을 살려(?)[* 실제로 김정일은 영화 같은 문화산업 쪽에 관심이 많았다. 때문에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사람을 납치해다(…) 영화도 만들고]] 세계 곳곳에서 긁어모은 영화필름도 소장하고 있었다.] 영화 감독으로 대성했다. 2013년 기준으로 고인이다. 대표작은 '우주 불가사리'이며, 개화기 초 연해주를 배경으로 조선인 이주민 일가가 빚는 인간 드라마를 담은 [[미나리(영화)|고사리]]를 유작으로 남겼다. 유작은 일반적으로 자전적인 내용을 담는 경우가 많고, 원 역사의 김정일이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유리 킴'으로 태어났던 것, 개화기 초 연해주를 배경으로 한 조선인 이주민 일가 에피소드라는 점을 들어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군밤의 김정일도 연해주 교포일 가능성이 높다. 개화기 초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김형직이나 김일성 대에 연해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 역사의 김형직이 만주 [[지린성]]에서 무면허 한약방 하다가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했고, 19세기 후반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개척한다고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했음을 고려하면 김형직 대에 만주에 갔다가 김일성 대에 연해주로 재이주했을 수도 있다.] * '''[[리춘히|이춘희]]''' 원 역사 조선중앙방송 보도국장. 원 역사와 달리 쭉 배우로 활동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김정일]] 눈에 들어 그의 페르소나로 활약했다. * '''리옹 김문''' 안느장을 중시조로 하는 안동 김문의 방계. 안느장부터 조선계 프랑스인이라서 대대로 국적 가리지 않고 통혼함을 저들만의 가풍으로 여긴다. 김옥균 사후 본처 소생과의 유산분쟁 끝에 그의 사재 상당 부분을 물려받는 대가로 동철과 조일동차공사 등 문중 사업에서는 모두 손을 뗐다. 그 이후 대대로 조선의 근현대사를 궁구하며 옥균과 고종대왕, 그 외 개화당 사람들과 옥균의 사형들의 행적을 연구하는 것을 가업으로 삼았다. 개중 몇몇 후손들은 대황란(대공황) 때 동영(영화) 사업에 뛰어들어 대성하였다. 이후 대공황이 끝나고 귀남이 제과국 차릴 무렵에 본가와 마침내 화해했다. * '''안느장 푸아송-킴'''(=김안장) 김옥균의 사생아. 실존인물이 아니다. 옥균이 프랑스 유학생 시절 [[리옹]] 여행 갔을 때 맺었던 인연의 소산으로 푸아송은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코레' 출신의 귀공자 '킴'이었다는 것 정도만 알면서 살다가 프랑스 언론에서 '코리아의 총리 무슈 킴'하는 것을 보고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옥균을 찾아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더니, 옥균이 이야기가 자신의 기억과 일치한다며 아들로 인정했다. 외가에 빚이 많았기에 그 후 옥균의 비서로 일하게 됐다.[* 명목상으로는 신분제를 정리하여 공사노비를 모두 해방하고 서얼차별을 철폐하기는 했으나, 아직 신분제의 잔재가 남아 있어 서자가 많고 서자가 집안일 돕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어 딱히 흉보는 사람은 없었다.] 일처리가 똑부러지는 데다 자기 생각을 윗사람 앞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것도 딱 옥균과 판박이라 김옥균도 정말 자기 아들답다고 생각 중이다. 1901년에 미국계 조선인과 결혼했다. * '''엘렌 푸아송-킴''' (=김애련) 안느장의 손녀. 다시 말해서 김옥균의 증손녀. 아멜리아의 고모이기도 하다. * '''아멜리아 푸아송-킴''' (=김미란) 안느장의 증손녀. 사실상 고종대왕 전문 박물관이 된 온양별궁에서 일한다. 50대 혼혈 여성으로 이목구비 뚜렷하고 살갗은 갈색에 체구도 훤칠하다. * '''[[이원철]]''' 원 역사 대한민국 최초의 이공계 박사. 1930년대 UN 직속 [[남극해]] 서던 툴레(Southern Thule) 제도에서 이루어진 비원 핵실험에 참가했다. 이미 이때부터 그린피스가 방사선 낙진의 위험성을 증명한 뒤라서 위험성을 줄이고자 남극해 절도 한복판에서 핵실험을 했다고. 당시 UN 체제는 대공황의 장기간 여파로 인해 각국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유명무실해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UN을 통한 세계평화에 억제력을 부여하기 위한 사명으로 이루어진 중요한 실험이었고, 이원철은 인도의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와 함께 지금의 핵폭탄으로는 원하는 위력이 안 나온다며 수소 폭탄의 개념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젊은 오펜하이머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두려움을 느꼈던 반면 이원철은 침착했으며, 오펜하이머가 "나는 죽음,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노라"는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을 인도인인 보스가 "시간(Kalah), 뭇 세계를 허무는 자"로 정정하며 우주에 영원한 것은 없고 만물은 순환한다는 힌두교 철학을 설명한 말이라고 설명하자 이원철이 그 말대로라면 서로 다투는 것이 현재의 천리라지만 그 천리조차 만고불변하지는 않을 거라며, 저 [[진천뢰|하늘을 울리는 벼락]](震天雷)과 같은 위력이라면 능히 하늘의 이치를 바꿀 수 있으리라 동의한다. 그 말에 보스도 '천 개의 태양이 함께 빛난들 그 광휘 이와 같으랴.'를 인용하며 핵폭탄 없이 세계평화가 이루어지면 더 좋겠지만, 특정 국가가 먼저 만들어내 절대적 무기(Absolute weapon) 앞에서 굴복하라고 요구했으면 그로 인해 끝없는 갈등이 이어졌을 거라 평하고, 그 말에 오펜하이머가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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